계기 영상에서 시작된 책
서문. 미감이라는 말이 징그러워진 순간
감도라는 거짓말 v1.6.1
이 책은 한 영상에서 시작됐다. 민희진의 "미감 기르는 법"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남대 강연 영상이었다. 제목만 보면 흔한 자기계발 클립처럼 보인다. 또 누가 감각을 키우는 법을 팔러 왔나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상의 첫머리에서 걸리는 말이 있었다.
그는 미감이라는 말이 너무 과잉 유통되고 있어서, 그 단어가 조금 징그럽게 느껴진다는 식으로 말한다. 바로 이 지점이 좋았다. 한국에서 미감과 감도의 대표 사례처럼 소비되는 사람이, 정작 그 단어의 유행 자체를 우아하게 여기지 않는 장면. 이 책은 바로 그 불쾌한 간극에서 시작됐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미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여러 감각의 조합이 왜 더 중요해졌는지를 설명한다. 매체가 늘어나고, 모두가 이미지를 만들고 접하고, 산업이 음악만이 아니라 표면과 분위기와 세계까지 함께 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있다. 하나, 미감은 실제로 중요해졌다. 둘, 그래서 미감이라는 말은 더 쉽게 썩는다. 중요한 말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기 허세를 그 안에 숨긴다. 시장에서 힘을 가진 단어는 언제나 무능한 사람들의 우산이 된다.
이제 이 책의 표적은 더 분명해졌다. 감도는 단순히 애매한 말이 아니다. 잘못 쓰일 때 감도는 싸게 이기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은 설명 비용을 아끼고, 듣는 사람은 반박 비용을 떠안는다. 이 구조를 보지 못하면 감도 비판은 그냥 취향 싸움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말들은 대개 오래 살지 못한다. 오래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개념이 아니라 통행증이고, 이론이 아니라 압박 도구이며, 미학이 아니라 잠깐 유행한 권력의 은어다. 한 시대의 사람들을 눌러놓고, 시간이 지나면 사어가 된다.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미감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부분이다. 불안해서 타인의 판단에 기대는 순간, 자기 판단은 흐려진다. 남의 판단에 맡기는 순간 자기 미감은 더 멀어진다. 이 말은 이 책의 정반대편에서 온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의 심장과 맞닿아 있다.
내가 싫어하는 감도병자는 바로 그 반대의 사람이다. 자기 판단 기준을 세우지 못했으면서, 남에게는 판정을 내리는 사람. 많이 보고, 읽고, 생각하고, 만들며 숙련한 기준이 아니라, 남의 레퍼런스와 업계 말투를 빌려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 불안을 견디지 못해 남의 취향에 기댄 사람이, 어느 순간 남의 작업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는 장면. 이보다 우스운 변신도 드물다.
그 영상은 미감을 키우려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보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아주 오래된 말을 다시 꺼낸다.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모욕처럼 들리는 말이다. 모두가 비밀 레시피를 원하는데 돌아오는 답은 결국 공부와 경험과 사고다. 참 맥 빠진다. 하지만 대개 진짜는 이렇게 재미없게 생겼다.
이 책은 그 재미없는 진짜와, 그 위에 올라탄 화려한 가짜를 구분하려 한다. 미감은 있을 수 있다. 감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있으려면 축적된 경험, 판단 기준, 제작 능력, 설명 책임, 실패를 통해 수정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업계에서 유통되는 감도는 너무 자주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뛴다. 읽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고, 자기 기준도 없고, 실패 조건도 말하지 않으면서, 마지막에 그럴듯하게 말한다. 감도가 좀 떨어져요. 이 한 문장으로 모든 빈칸을 덮으려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미감을 부정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미감이라는 말이 견뎌야 할 무게를 되찾자는 책이다. 감도라는 단어가 징그러워진 이유는 그것이 너무 하찮은 사람들의 너무 편한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상 하나가 이 책의 스위치를 눌렀다. 진짜 감도는 숙련과 판단의 문제인데, 업계의 가짜 감도는 설명 회피와 계급 흉내의 문제다. 이 차이를 더는 같은 단어 안에 방치하면 안 된다. 이제부터 그 단어를 조금 해부해보자. 우아하게는 못 하겠다. 이미 단어가 너무 징그러워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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