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없는 감도는 신탁이 된다
브랜딩 업계의 신관들
감도라는 거짓말 v1.6.1
브랜딩 업계에는 이상한 성직자들이 있다. 직함은 대개 세속적이다. 브랜드 디렉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략 컨설턴트, 큐레이터, 에디토리얼 어쩌고. 하지만 회의실에서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꽤 종교적이다. 그들은 기준을 설명하기보다 분위기를 선포한다.
신관은 신의 뜻을 설명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너무 자세히 설명하는 순간 신비가 깨지기 때문이다. 신탁은 언제나 약간 흐려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와도 해석할 수 있다.
감도 신관들도 비슷하다. 그들은 말한다. 결이 안 맞아요. 톤이 아직 덜 잡혔어요. 브랜드다움이 안 보여요. 무드가 얕아요. 방향은 좋은데 깊이가 없어요. 이 문장들은 모두 뭔가 말하는 것처럼 생겼지만, 막상 붙잡고 보면 손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결이 무엇인가. 톤은 어떤 기준으로 잡히는가. 브랜드다움은 어디에 쓰여 있는가. 깊이는 무엇의 깊이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대개 표정이 미묘해진다. 질문한 사람이 갑자기 감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구조가 참으로 교묘하다.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기준을 물어본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이것이 감도 신관의 첫 번째 기술이다. 설명 책임을 질문자에게 되돌리는 것. 자신은 모호하게 말했지만,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상대의 감도가 부족한 것이 된다. 참 편리하다. 말은 자기가 흐렸는데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을 탓한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판단의 형식을 가진 권위 발화다. 내용보다 위치가 먼저 작동한다. 누가 말했는가가 무엇을 말했는가를 이긴다. 같은 문장을 신입 디자이너가 말하면 취향 과잉이 되고, 유명 디렉터가 말하면 인사이트가 된다. 문장의 깊이가 아니라 명함의 두께가 의미를 만든다.
예술철학에서 비평은 작품과 관객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좋은 비평은 작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어떤 형식이 어떤 경험을 만드는지, 어떤 맥락에서 어떤 판단이 가능한지 보여준다. 그런데 감도 신관의 비평은 다리를 놓지 않는다. 다리 앞에 안개 기계를 튼다.
그들은 작품을 더 잘 보게 만들기보다 자신이 더 잘 보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좋은 비평은 대상이 선명해지고, 나쁜 비평은 비평가가 커진다. 감도 신관의 말이 끝난 뒤 결과물이 더 이해되는가. 아니면 말한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이는가. 답은 대개 후자다.
고고학적으로 파보면 이 신관 언어는 특정 장소에서 잘 보존된다. 브랜드 워크숍의 포스트잇, 피그마 코멘트, 노션 전략 문서, 제안서의 마지막 다섯 페이지, 인스타그램 캡션, 그리고 누군가 굳이 영어로 적어둔 manifesto. 거기에는 비슷한 화석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authentic, timeless, curated, elevated, subtle, intentional. 한국어로 돌아오면 진정성, 본질, 절제, 밀도, 감도, 결. 단어 자체가 죄는 아니다. 문제는 이 단어들이 너무 자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장 안에서 노동하지 않는 단어들이 권위만 먹고 산다.
논리적으로는 더 우습다. '브랜드다움이 없다'는 문장은 브랜드다움의 기준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기준을 말하지 않는다. '무드가 얕다'는 문장은 깊이의 척도를 전제한다. 그런데 척도가 없다. '결이 다르다'는 문장은 비교 대상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대상은 대개 말한 사람의 머릿속 어딘가에만 있다.
이런 문장은 반박하기 어렵다. 반박하려면 먼저 상대가 말하지 않은 기준을 복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무자는 이중 노동을 한다. 결과물도 만들고, 감도 신관의 모호한 판정도 해석한다. 이쯤 되면 크리에이티브가 아니라 점술 상담이다. 감도 무당은 바로 이 틈에서 태어난다.
신관의 권위가 비싼 이유는 신비로워서가 아니다. 남에게 비용을 떠넘기기 때문이다. 그는 한마디만 하면 된다. 결이 아니다. 그러면 상대는 결의 사전, 브랜드의 역사, 대표의 취향, 고객의 반응, 이전 레퍼런스를 전부 뒤져야 한다. 신탁은 늘 짧고, 노동은 늘 길다.
포퍼식으로 묻자. 어떤 결과가 나와야 이 신탁은 틀린 것이 되는가. '브랜드다움이 없다'고 했는데 고객이 더 잘 기억하면? '무드가 얕다'고 했는데 전환율이 오르면? '결이 안 맞다'고 했는데 내부 팀이 더 빠르게 일관된 결과물을 만들면? 그때 감도 신관은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가.
대개 그렇지 않다. 그는 말한다. 숫자로만 볼 수 없는 게 있어요. 장기적으로 봐야 해요. 브랜드는 그런 식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물론 맞는 말일 수 있다. 브랜드에는 단기 숫자로 잡히지 않는 층위가 있다. 문제는 그 말을 실패할 때마다 방패로 꺼내면, 그것은 깊은 이해가 아니라 면책 기술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이비성이다. 감도 신관의 언어는 틀릴 조건을 갖지 않는다. 성공하면 자신의 감각이 증명된 것이고, 실패하면 아직 세상이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고객이 이해하면 감도 있는 방향이고, 고객이 이해하지 못하면 고객이 저급하다. 이렇게 편한 세계관 안에서는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미학사적으로 보면 더 가소롭다. 칸트의 취미판단은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 동의를 요구한다는 난제를 품고 있었다. 이 난제는 꽤 섬세하다. 나는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남들도 동의해야 할 것처럼 말한다. 왜 그런가. 이 질문은 취향의 공공성을 묻는다.
브랜딩 회의실의 감도 신관은 이 난제를 가장 저급하게 해결한다. 내가 고급스럽다고 느끼니 너도 따라야 한다. 끝. 칸트가 고생해서 열어둔 문제를 회의실 권력으로 덮어버린다. 이것을 철학의 타락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너무 거창하다. 그냥 공부 안 한 꺼드럭에 가깝다.
부르디외를 가져오면 신관의 옷이 조금 더 벗겨진다. 감도 신관은 순수한 미적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특정 문화자본을 자연스럽게 휘두르는 사람일 때가 많다. 그는 어떤 호텔 로비, 어떤 잡지, 어떤 해외 브랜드, 어떤 전시, 어떤 동네, 어떤 커피 맛을 당연한 기준처럼 말한다.
그 기준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기준이라는 사실을 숨긴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훈련을 자연스러운 눈으로 둔갑시킨다. 계급적 친숙함을 미적 보편성처럼 말한다. 그러고는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감도가 부족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미학이 아니라 예절 교육이다.
신관의 언어는 실무를 망친다. 기준이 없기 때문에 재현할 수 없고,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팀이 학습하지 못한다. 오늘은 너무 차갑다고 하고, 내일은 너무 따뜻하다고 한다. 오늘은 너무 설명적이라고 하고, 내일은 왜 더 명확하지 않냐고 한다. 방향이 아니라 기분이 움직이니, 팀은 원칙이 아니라 눈치를 배운다.
눈치가 쌓이면 조직은 감도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겁이 많아진다. 사람들은 더 좋은 안을 내기보다 덜 혼날 안을 낸다. 뾰족한 판단보다 안전한 무드를 고른다. 실험보다 레퍼런스를 붙인다. 자기 언어보다 유명 브랜드의 그림자를 빌린다. 그러고는 말한다. 이 정도면 감도 있지 않나요.
아니다. 그것은 감도가 아니라 신관에게 바칠 제물이다. 제물은 대개 예쁘다. 하지만 살아 있지 않다.
좋은 디렉터는 신관이 아니다. 좋은 디렉터는 기준을 만든다. 왜 이 방향인지 말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는지 밝힌다. 어떤 결과가 나오면 판단을 수정할지 열어둔다. 실무자가 다음번에 스스로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좋은 디렉션은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고 기준을 크게 만든다.
그러니 감도 신관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의 말을 들은 뒤 내가 더 잘 만들 수 있게 되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허락을 더 기다리게 되었는가. 전자라면 디렉션이다. 후자라면 신탁이다.
기준 없는 감도는 판단이 아니라 신탁이다. 신탁은 신비로워 보이지만, 일하는 사람에게는 대개 비효율적인 폭력이다. 브랜딩 업계가 정말 감도를 말하고 싶다면 먼저 신관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름다움은 제단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공개하고 결과물로 책임질 때 겨우 조금씩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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