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눌렀다가 죽은 말들

사어가 된 권력어들

감도라는 거짓말 v1.6.1

감도는 아주 현대적인 말처럼 굴지만, 사실 이런 말은 늘 있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미, 취향, 교양, 태도, 상류성, 자연스러움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 이상한 단어를 만들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이 어느 순간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말에서 사람을 가르는 말로 변한다는 데 있다.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 미학에는 je ne sais quoi가 있었다. 문자 그대로 하면 '나는 무엇인지 모른다'에 가까운 말이다. 말로 딱 잡히지 않는 매력, 규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 좋은 개념일 수 있다. 실제로 아름다움에는 설명하고도 남는 잔여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이 권력화되면 아주 편리해진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있어. 너는 그걸 못 느껴. 더 설명할 수는 없어. 이쯤 되면 미학이 아니라 출입 심사다.

르네상스 궁정에는 sprezzatura가 있었다. 노력하지 않은 듯 보이는 자연스러움, 공들였지만 공들인 티를 내지 않는 기술. 원래는 엄청난 훈련의 결과를 가볍게 보이게 하는 고급 기술이었다. 그런데 가짜가 이 말을 잡으면 장면이 우스워진다. 훈련은 없는데 힘을 빼라고 말한다. 구조는 없는데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쌓지 않은 사람이 무심함만 흉내 낸다. 그건 귀족적 여유가 아니라 게으른 포즈다.

bon tonthe ton도 있다. 좋은 톤, 좋은 태도, 좋은 사회의 말투. 프랑스와 영국 상류사회에서 이런 말은 단순한 취향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그 세계에 속하고, 누가 아직 밖에 있는지를 나누는 신호였다. 오늘의 회의실에서 '톤이 안 맞다'는 말이 이상하게 익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톤은 때로 언어가 아니라 울타리다.

18세기 영국의 picturesque는 풍경을 그림처럼 보는 취향을 만들었다. 이것도 처음부터 멍청한 말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그림 같은 것을 구분하려는 진지한 미학적 시도였다. 그러나 유행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실제 장소를 보기보다 그림처럼 보이는 프레임을 찾는다. 오늘날의 무드보드와 핀터레스트가 여기서 멀지 않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이미 이미지처럼 보이는 각도를 찾는 것.

영국에는 macaroni도 있었다. 18세기 유행을 과하게 따라 하는 남자를 조롱하던 말이다. 너무 꾸미고, 너무 외국풍이고, 너무 자기 자신을 전시하는 사람. 이후의 dandy와 19세기 말의 aesthete도 비슷한 위험을 품는다. 미적 삶은 가능하다. 그러나 미적 삶의 흉내는 더 쉽다. 옷, 말투, 책장, 카페, 전시, 호텔 로비, 잡지 이름만으로 인간이 달라진 것처럼 연기하는 일은 늘 있었다.

동아시아에도 좋은 사례가 있다. 위진 시대의 청담은 '맑은 담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적 사교와 형이상학적 대화였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pure conversation이라고 옮긴다. 대략 3세기에서 4세기, 정치가 위험하고 궁정이 탁했던 시대에 지식인과 귀족들은 노장사상, 형이상학, 인물 품평을 두고 세속 권력과 거리를 둔 대화를 벌였다. 말하자면 더러운 정치의 언어에서 빠져나오려는 지적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러니 청담을 처음부터 헛소리로 몰면 안 된다. 실제로 그 시대의 사유와 문체와 인물 평은 독특한 문화적 힘을 가졌다. 죽림칠현 같은 이름이 지금까지 남은 것도 단지 술 마시고 폼 잡아서가 아니다. 속세의 명리와 낡은 도덕에 저항하려는 자유의 감각도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 다음이다. 어떤 말이 현실을 견디기 위한 사유에서 출발해, 현실을 피하는 태도의 장식이 되는 순간이 온다.

청담이 이 책에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 변질 구조 때문이다. 현실은 못 바꾸는데 말의 고도만 높아진다. 실천은 없는데 태도는 고상하다. 책임은 안 지는데 말은 맑다. 이때 청담은 철학이 아니라 계급적 포즈가 된다.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의 품격으로 자기 지위를 보존하는 장면. 회사의 감도 회의가 왜 갑자기 익숙해지는가.

회의실의 감도병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실제 미적 판단과 숙련의 언어였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만들지 않는 사람이 만드는 사람을 판정하는 고상한 말투가 된다. 말은 맑고, 기준은 흐리고, 책임은 아래로 내려간다. 청담이 공허해지는 순간과 감도 회의가 우스워지는 순간은 같은 병명을 공유한다. 말이 현실을 밝히지 않고 현실에서 빠져나가는 통로가 되는 병.

이 말들의 공통점은 처음부터 전부 사기였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대개 출발점에는 실제 감각이 있었다. 말로 다 잡히지 않는 매력, 훈련된 자연스러움, 사회적 태도, 풍경을 보는 새로운 방식, 미적 삶의 실험, 형이상학적 대화. 문제는 말이 실제 경험에서 떨어져 나와 신분증이 될 때 시작된다.

개념은 설명하기 위해 태어나지만, 권력어는 설명하지 않기 위해 살아남는다. 개념은 대상을 더 잘 보게 만들지만, 권력어는 사람을 위축시킨다. 개념은 반박을 견디지만, 권력어는 반박하는 사람을 촌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권력어는 늘 짧고, 그 권력어가 만든 피해자의 침묵은 길다.

실체 없는 용어는 한 시대의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사어가 된다. 이것은 단어의 자연사가 아니라 권력의 사용 기한이다. 단어가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자기 판단을 의심한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나. 내가 촌스러운가. 내가 감도가 없나.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은 낡고 이상하고 우스워진다. 문제는 웃음이 늦게 온다는 것이다.

사어가 된 권력어를 보면 우리는 쉽게 웃는다. 그때 사람들은 왜 저런 말을 믿었을까. 왜 저런 표정을 어려워했을까. 왜 저런 취향을 고급이라고 착각했을까. 그러나 지금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의 감도, 결, 무드, 힙, 엣지, 올드는 내일의 어색한 박제일 수 있다.

그러니 질문은 단어가 얼마나 멋진가가 아니다. 그 단어가 지금 누구를 침묵시키는가다. 누가 그 말 덕분에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누가 그 말 때문에 자기 판단을 포기하는가. 누가 그 말의 비용을 대신 치르는가. 이 질문에 답하면 감도는 갑자기 미학의 말이 아니라 권력의 말로 보인다.

감도도 언젠가 사어가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쓰이는 감도는 오래 못 간다. 그때 남는 것은 단어가 아니다. 그 단어 때문에 자기 작업을 의심했던 사람들, 설명을 요구했다가 무식한 사람이 된 사람들, 근거 없는 판정 앞에서 야근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감도라는 말을 지금 해부해야 한다. 나중에 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덜 당하기 위해서다.

Early Reader Feedback

원고 피드백 남기기

읽다가 헷갈린 곳, 더 듣고 싶은 사례, 동의하기 어려운 문장을 알려주세요. 공개 댓글이 아니라 저자에게만 전달되는 피드백입니다.

본문에서 문장을 드래그한 뒤 누르면 선택 문장이 함께 저장됩니다.

피드백 유형

BiteMark Press는 Cloudflare Web Analytics로 익명 트래픽을 보고, 동의한 경우에만 GA4와 Microsoft Clarity를 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