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되지 않은 모방
레퍼런스 중독자들
감도라는 거짓말 v1.6.1
감도 높은 척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레퍼런스를 많이 아는 것이다. 해외 브랜드, 일본 편집숍, 북유럽 미니멀리즘, 어느 호텔의 로비, 어느 독립서점의 진열, 어느 스튜디오의 포스터. 이름을 많이 댈수록 생각이 깊어 보인다.
레퍼런스는 필요하다. 혼자 세계를 발명할 수는 없다. 좋은 작업자는 언제나 이전 작업에서 배운다. 문제는 레퍼런스를 원리로 번역하지 않고 표면으로 수입할 때 생긴다. 왜 좋은지, 어떤 맥락에서 작동했는지, 우리 고객과 제품에서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묻지 않으면 레퍼런스는 사고의 재료가 아니라 장식품이 된다.
그래서 가장 싫은 장면은 이것이다. 핀터레스트 캡처해서 보내지 마라. 그게 네 것이 아니다. 캡처는 소유가 아니고, 저장은 이해가 아니고, 보드는 세계관이 아니다. 남이 만든 이미지의 출처와 맥락을 지운 채 '우리도 이런 느낌'이라고 말하는 순간, 레퍼런스는 영감이 아니라 면피가 된다.
레퍼런스를 쓰려면 최소한 출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그런 형태가 되었는지 따라가야 한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이미지만 뜯어오면, 그것은 취향이 아니라 남의 노동 위에 얹힌 게으름이다.
책장에 Monocle이랑 Magazine B 몇 권 꽂아놓는 장면도 비슷하다. 읽었다면 상관없다. 좋아한다면 더 상관없다. 문제는 그것이 생각의 흔적이 아니라 감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정물화가 될 때다. 책장이 아니라 배경 세트가 되는 순간, 취향은 읽는 행위에서 빠져나와 인증샷의 소품이 된다.
이런 책들은 죄가 없다. 죄는 그 책을 읽지 않은 채 그 책이 주는 계급감만 빌려 쓰는 사람에게 있다. Monocle과 B 매거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 판단의 재료로 삼지 못하고 자기 분위기의 명찰로만 쓰는 태도가 아니꼽다.
나쁜 모방은 표정을 훔친다. 좋은 모방은 구조를 배운다. 감도병자는 대개 표정에 빠진다. 여백, 흐릿한 사진, 낯선 영어 단어, 작은 로고, 낮은 채도의 컬러, 툭 던진 듯한 문장. 이것들이 모이면 어떤 종류의 고급스러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맥락이 빠진 표면은 오래 못 간다.
레퍼런스 중독자의 제안서에는 이미지가 많고 결정은 적다. 이런 느낌, 이런 무드, 이런 결. 그런데 정작 이 사업이 누구에게 무엇을 약속해야 하는지는 흐리다. 고객의 언어보다 레퍼런스의 그림자가 먼저 온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한국 브랜딩 장면의 많은 감도는 수입된 표면의 퇴적층이다. 킨포크, 편집숍, 일본 로컬 브랜드, 애플식 미니멀리즘, 스타트업 랜딩페이지, 에어비앤비식 사진, 디터 람스의 문장 몇 개. 하나하나는 죄가 없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 언어로 소화되지 않은 채 감도라는 이름으로 눌러붙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을 가져오면 갑자기 장면이 선명해진다. 그는 부유한 계급이 돈과 시간을 어떻게 보이게 쓰는지 봤다. 소비는 필요를 채우는 행위만이 아니라 지위를 보여주는 공연이 된다. 오늘의 감도병도 비슷하다. 그는 어떤 것을 좋아해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소비한다. 잡지는 읽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배경의 재료가 되고, 카페는 쉬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 감도를 전시하는 무대가 된다.
옛날 사치금지법이 옷, 식탁, 집, 장식품을 통제하려 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유용하다. 사회는 오래전부터 물건이 그냥 물건이 아니라 신분의 신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법이 금지하지 않을 뿐이다. 대신 인스타그램과 제안서와 사무실 책장이 말한다. 나는 이런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곳에 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무드를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감도는 민주화된 궁정 예절이 되었다. 왕궁의 소매 길이와 식탁 규칙이 이제는 매거진 꽂는 방식과 커피잔과 레퍼런스 폴더로 바뀐 것이다.
존 버거(John Berger)의 Ways of Seeing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보는 일이 순수하지 않다는 걸 계속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그냥 보지 않는다. 이미지가 놓인 자리, 붙은 말, 옆에 있는 상품, 그것을 보는 사회적 욕망까지 함께 본다. 그러니 레퍼런스를 보낸다는 것은 이미지 파일 하나를 보내는 일이 아니다. 그 이미지가 끌고 들어오는 욕망과 권력과 맥락까지 같이 보내는 일이다. 그런데 감도병자는 그 무게를 모른다. 그는 이미지를 파일처럼 옮기면 감각도 같이 옮겨진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가져오면 더 씁쓸해진다. 복제 기술은 예술작품의 유일성을 흔들었고, 이미지는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복제된 이미지가 다시 아우라 흉내를 낼 때다. 핀터레스트에 저장된 호텔 로비, 빈티지 포스터, 일본 골목, 북유럽 식탁, 1970년대 영화 스틸이 전부 작은 성물처럼 다뤄진다. 원본의 맥락은 사라졌는데, 원본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고급스러운 기운만 남는다.
무드보드는 그래서 위험하다. 잘 쓰면 사고를 정리하는 도구지만, 못 쓰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생각하는 척하기 가장 좋은 장치다. 무드보드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침묵이 있다. 이미지가 많기 때문에 말이 적어도 깊어 보인다. 그러나 좋은 기획은 이미지 뒤에 문장이 있다. 왜 이 이미지인가.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이 고객에게는 왜 필요한가. 이 사업의 가격, 유통, 제품, 서비스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무드보드는 감도의 증거가 아니라 사고의 알리바이다.
나쁜 레퍼런스 사용자는 자기 판단을 숨긴다. 그는 '이런 느낌'이라고 말한다. 좋은 작업자는 '이 원리를 가져오자'고 말한다. 전자는 표면을 옮기고, 후자는 구조를 번역한다. 전자는 남의 세계를 축소해서 붙이고, 후자는 자기 세계의 규칙을 만든다.
그래서 레퍼런스 회의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취향 질문이 아니다. 이 이미지에서 우리가 훔치고 싶은 표면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이미지가 해결한 문제는 무엇인가. 저 브랜드가 저 색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저 공간이 저만큼 비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 문장이 짧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가. 아니면 그냥 우리도 그런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가.
감도병자는 이 마지막 질문을 싫어한다. 들키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어떤 형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자기에게 붙여주는 사람됨을 좋아한다.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니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독립서점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독립서점을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좋은 잡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은 잡지가 있는 방의 주인처럼 보이고 싶다.
레퍼런스는 지도여야 한다. 목적지가 되면 곤란하다. 지도만 들고 여행한 척하는 사람은 결국 남의 풍경을 자기 삶이라고 우긴다.
좋은 레퍼런스는 최종 결과물에서 사라진다. 원리가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나쁜 레퍼런스는 끝까지 보인다. 표면만 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도 높은 척하는 결과물일수록 이상하게 출처가 너무 잘 보인다. 어디서 봤는지 알겠는데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감도는 종종 번역되지 않은 모방이다. 번역하지 않은 감도는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라 게으른 것이다. 레퍼런스를 쓸 줄 안다는 것은 많이 저장했다는 뜻이 아니다. 남의 세계를 자기 문제의 언어로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능력이 없으면 핀터레스트 보드도, 책장도, 매거진도, 영화 캡처도 전부 같은 물건이 된다. 남의 감각에서 뜯어온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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