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릴 수 없는 말들의 회의실
감도가 좀 떨어져요
감도라는 거짓말 v1.6.1
회의실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감도가 좀 떨어져요.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진다. 아무도 그 문장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다.
대개 이 문장은 아주 조용히 나온다.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다. 감도라는 말은 이미 회의실에서 작은 종교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감도를 언급하면, 그 순간부터 대화는 이유의 세계에서 분위기의 세계로 넘어간다.
무엇이 떨어졌는가. 색인가, 구조인가, 기능인가, 기억 가능성인가, 구매 전환인가. 아니면 그저 말한 사람의 점심 기분인가. 대개 답은 없다. 감도라는 말은 설명을 시작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끝내기 위해 쓰인다.
이 장면이 가소로운 이유는 말하는 사람이 깊은 미학적 판단을 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기준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보다 편한 권위가 어디 있나. 판정은 했는데 근거는 없다. 공격은 했는데 책임은 없다. 분위기는 잡았는데 문장은 비어 있다.
물론 세상에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까지 부정하면 촌스럽다. 문제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아름다움과, 애초에 설명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내뱉는 흐릿한 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브랜딩 업계의 감도는 자주 후자다.
철학은 멋진 말을 더 멋지게 만들어주는 장식장이 아니다. 오히려 제일 먼저 김 빠지는 질문을 한다. 방금 그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판단인가, 취향 고백인가, 수정 지시인가, 아니면 그냥 네가 마지막 말을 하고 싶다는 표시인가. 감도라는 말은 이 질문 앞에서 갑자기 얇아진다. 질문을 견디지 못하는 권위는 대체로 권위가 아니라 자세다.
예술철학도 비슷하다. 아름다움을 '와 좋다'에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 어떤 형식으로 보이는지, 어떤 매체에서 작동하는지, 누가 어떤 맥락에서 보는지, 어떤 제작 조건을 통과했는지 묻는다. 그런데 회사 회의실의 감도는 이 질문들을 한 줄로 접어버린다. 결이 안 맞아요. 생각은 한 줄로 줄었고, 고치는 일은 만든 사람의 야근으로 늘어난다.
미학사를 외우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아름다움을 다루려면 최소한 질문의 체력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고대에는 비례와 질서가 문제가 되었고, 중세에는 빛과 상징과 세계의 구조가 문제가 되었고, 근대에는 주관적인 취향이 왜 남의 동의를 요구하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다들 어렵게 싸웠다. 적어도 '그냥 느낌이 좀'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그 긴 논쟁 끝에 오늘 우리가 도착한 회의실에서 누군가는 말한다. 감도가 좀 떨어져요. 이건 빈곤한 문장이라기보다 빈곤을 숨기는 문장이다. 철학자들을 줄줄이 무덤에서 불러낼 필요도 없다. 그냥 근거를 말해달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만 보면 된다.
이 책은 감도라는 말의 작은 고고학을 시도한다. 고고학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은 없다. 유적지는 대개 회의실, 제안서, 인스타그램 피드, 편집숍, 브랜드 워크숍, 그리고 쓸데없이 여백이 많은 PDF다. 그곳에서 감도라는 말이 어떻게 쌓였는지, 어떤 문장들과 같이 굳었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권위를 주었는지 파내보자는 뜻이다.
감도는 혼자 오지 않는다. 보통 결, 톤, 무드, 브랜드다움, 라이프스타일, 큐레이션, 여백, 취향, 로컬, 프리미엄 같은 단어들을 거느리고 온다. 이 단어들이 모두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나쁜 것은 이 단어들이 근거 없이 서로를 보증하는 방식이다. 결이 안 맞다. 왜? 무드가 다르니까. 무드가 왜 다른가? 브랜드다움이 없으니까. 브랜드다움이 뭔가? 감도가 떨어진다. 완벽한 원형 감옥이다.
이 원형 감옥은 경제적이다. 감도라고 말하는 순간 말한 사람은 기준을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듣는 사람은 그 기준을 추측해야 한다. 말한 사람은 한 단어로 끝내고, 만든 사람은 그 한 단어를 고치기 위해 색과 레이아웃과 카피와 전략을 다시 뒤진다. 이것이 싸게 이기는 말의 작동 방식이다.
논리적으로 보자. 감도가 떨어진다는 문장은 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명제로 기능하려면 최소한 참과 거짓을 가를 조건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관찰되면 이 판단이 맞고, 무엇이 관찰되면 틀린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그 말은 판단이 아니라 기분의 행정 명령에 가깝다.
여기서 칼 포퍼(Karl Popper)를 꺼내면 누군가는 불편해할 수 있다. 미학에 반증가능성을 들이대는 건 너무 과학주의 아니냐고. 맞다. 미학은 물리학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실험실에서만 검증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미적 판정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포퍼에게서 빌려오려는 것은 과학의 제복이 아니라 태도다. 어떤 주장이 자신의 실패 조건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면, 그 주장은 지식처럼 행동할 자격이 약해진다. 틀릴 수 없는 말은 깊은 말이 아니라 책임지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그 감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고객이 이해하지 못하면 틀린 것인가. 구매가 일어나지 않으면 틀린 것인가. 기억되지 않으면 틀린 것인가. 실무자가 같은 원칙을 재현하지 못하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여전히 감도는 맞고 세상이 틀린 것인가.
브랜딩 업계의 감도 담론은 여기서 자주 사이비처럼 움직인다. 성공하면 감도가 맞았다고 한다. 실패하면 대중이 아직 못 따라왔다고 한다. 클라이언트가 망쳤다고 한다. 시장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한다. 실행이 부족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매번 그렇다면 그건 설명이 아니라 피난처다.
사이비의 특징은 세계가 자신을 반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론은 살아남는다. 예언이 맞으면 교주가 맞다. 예언이 틀리면 신도들의 믿음이 부족했다. 감도도 비슷하다. 팔리면 감도 덕분이고, 안 팔리면 시장이 천박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업 모델이다.
이때 감도는 미학이 아니다. 권력의 언어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판정권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는 해명 의무를 준다. 이상하지 않은가. 근거 없이 말한 사람이 편하고, 실제로 만든 사람이 불편하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조직은 점점 덜 만들고 더 많이 떠든다.
부르디외식으로 말하면 감도는 순수한 눈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밴 계급이다. 어떤 카페를 좋아하는지, 어떤 호텔 로비를 편안해하는지, 어떤 잡지를 옆구리에 끼는지, 어떤 외국 브랜드 이름을 자연스럽게 발음하는지, 어떤 여백을 고급스럽다고 느끼는지. 이런 것들은 그냥 취향이 아니라 훈련된 생활양식이다.
문제는 그 훈련된 생활양식을 실력이라고 우기는 순간이다. 감도 있는 사람은 종종 자신이 아름다움을 더 잘 본다고 믿는다. 사실은 특정 계층의 표정과 말투와 소비 문법을 더 익숙하게 흉내 낼 뿐인데도 말이다. 이걸 미감이라고 부르면 고상해 보이고, 계급 흉내라고 부르면 갑자기 얼굴이 굳는다.
그렇다고 대중 취향이 늘 옳다는 말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가면 또 다른 싸구려가 된다. 이 책의 표적은 고급 취향이 아니다. 고급 취향을 가진 척하면서, 왜 좋은지 설명하지 못하고, 무엇을 만들지도 못하고, 실패했을 때 책임지지도 않는 태도다. 취향은 죄가 아니다. 취향으로 남을 진압하는 순간부터 우스워질 뿐이다.
그러니까 감도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최소한 몇 가지는 말해야 한다. 무엇이 좋은가. 왜 좋은가. 누구에게 좋은가. 어떤 맥락에서 좋은가. 무엇을 포기하고 그것을 택하는가. 어떤 결과가 나오면 이 판단을 수정할 것인가. 여기까지 말할 수 있다면 감도는 조금쯤 판단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대개 감도병자는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느낌이 좀 아니에요.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추리 게임을 시작한다. 어떤 느낌이 아닌지, 왜 아닌지, 어떻게 바꾸라는 건지 모두가 눈치를 본다. 감도 발화자는 왕좌에 앉고, 나머지는 그 흐릿한 기분을 구현하기 위해 노동한다.
이것이 감도라는 말의 추한 편리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틀릴 수 있다. 색이 문제라고 하면 색을 바꿔서 검증할 수 있다. 구조가 문제라고 하면 구조를 고쳐볼 수 있다. 고객 이해가 문제라고 하면 테스트할 수 있다. 하지만 감도가 문제라고 하면 아무것도 정확히 고칠 수 없다. 그래서 발화자는 안전하다.
안전한 비평은 대개 하찮다. 비평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게 좋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기 때문이다. 이게 나쁘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릴 수 있는 지점을 여기까지 열어두겠다. 이런 긴장을 견딜 때 비평은 지식에 가까워진다. 감도 타령은 이 긴장을 회피한다.
그래서 나는 감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먼저 묻고 싶다. 그 말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말로 누가 편해지고 누가 일하게 되는가. 그 말은 무엇을 밝히는가, 아니면 무엇을 숨기는가. 그 말 뒤에 실제 미적 판단이 있는가, 아니면 고급스러운 척하는 표정만 남았는가.
회의실에서 감도가 좀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본다. 철학적으로는 책임 없는 판단을 본다. 예술철학적으로는 제작과 감상의 단절을 본다. 미학사적으로는 거대한 논쟁의 싸구려 잔해를 본다. 고고학적으로는 특정 계급 취향의 퇴적층을 본다. 논리적으로는 실패 조건 없는 문장을 본다. 포퍼식으로는 반증되지 않는 작은 사이비를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조금 웃을 수 있다. 저렇게 빈 문장을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 앞에서 웃지 않는 것은 예의일 수는 있어도 지성은 아니다. 물론 실제 회의실에서 크게 웃으면 다음 프로젝트가 피곤해질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 대신 웃자.
감도는 설명이 아니라 진압이다. 이 장의 결론은 여기서 시작한다. 누군가 감도를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말의 작동 방식을 봐야 한다. 그것이 대화를 여는가, 닫는가. 판단을 선명하게 하는가, 흐리게 하는가. 만든 사람을 돕는가, 침묵시키는가.
진짜 미감은 더 구체적이다. 형식, 기능, 맥락, 반복, 지속성, 기억 가능성, 사용자의 몸에서 검증된다. 진짜 미는 꺼드럭거리지 않는다. 결과물 안에서 조용히 버틴다. 감도는 말로 권위를 세울 때 가장 하찮고, 결과물 안에서 책임질 때만 가까스로 의미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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